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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경제학

부자가 되고 싶다면 통찰력을 키워라 짱 부자 경제학

by 호이짜호이호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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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세 가지 통찰할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자기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남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를 알고, 자기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그들과 조화를 이루어나갈 때 건강한 인간관계가 형성됩니다.
눈이 자기 자신에게만 고정되어 있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을 배려할 줄 모르게 되고
그러한 상황이 계속되면 주위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셋째는 세상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은 지금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
나는 이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는 눈입니다.
개인이 속해 있는 사회 전체가 성장하지 않는 한 개인의 성장은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남을 보는 지혜로운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 전체를
통찰하는 눈을 갖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그런 눈이 생겼을 때
자신이 속한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와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먼저 나를 보고, 그다음 다른 사람들을 보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속한 사회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 이상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눈이 있는 사람의 두 발은 현실을 단단하게 딛고,
그의 머리와 가슴은 이상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부족한 건 돈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통찰력을 키워라


부족한 건 돈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다. 짱 부자 경제학

이 말에서 당신과 내가 소통하는 꽃이란 같은 꽃이지만 다른 꽃이다.

우선 "꽃"이라는 말에 당신이 무의식적으로 형상 없이 떠올린 이미지는 꽃이 아니라 "말"이었다, 당신이 이미지로서의 꽃을 만나려면 이 말 다음에 실제 꽃의 모양을 하나하나 그려본 다음에야 당신이 "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꽃을 떠 올렸는지를 스스로 알게 된다.

이것이 대개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수준이다.

당신이 아직 어스름한 새벽에 숲 길을 가다가 새끼줄을 보았다.

이때 당신이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해서 움찔하고 놀랐다면 그것은 당신이 받아들이는 오감의 매너리즘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순간 물러서서 그것을 자세히 살핀 다음 뱀이라기엔 질감이 딱딱하고 , 뱀이라기엔 움직임이 없고, 뱀 이라기엔 길이가 길었었다는 것을 알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때 뱀을 보고 놀라는 당신의 마음은 숲길에는 뱀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때로는 당신은 보호하지만 때로는 당신에게 숲을 즐 길 수 없게 하는 마음의 올가미다.

이렇듯 우리는 통찰적인 부분과 미시적인 부분의 대립 속에 살아간다.

당신이 숲길에서 뱀을 밟을까 두려워 땅만 보고 걸어간다면 당신은 그 숲을 지난 다음에도 그 숲에서 들리던 아름다운 새소리와 들꽃의 아름다움,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들의 군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이 숲을 느끼고 오래된 나무 등걸에 자란 작은 슬픔에 취할 때 언젠가 뱀에 발을 물릴 수도 있다.

그래서 부자의 통찰은 간과를 필요로 한다.


이번에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감상해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에 등장하는 꽃은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불러주는 "나"는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다.

지금 이 순간 설악산 계곡의 어느 골짜기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 한 떨기는 스스로 피어 있지만 없는 것이다.
그 꽃은 누군가의 눈에 띄어 "꽃"이라는 인식이 덧 씌워지지 않는 한 그것은 꽃이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그렇다.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지극히 작고 편협한 세계다, 전 우주를 생각하고 흘러간 억겁의 세월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한 점의 먼지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모르는 시간의 저편 공간의 저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기다리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때문에 우리가 아는 한 줌의 지식은 미시적으로 접근하면 할수록 한계에 부닥친다.

우리가 지구를 알고 은하와 태양계를 다 안다고 해도 시공간이 만들어 낸 거대한 차원의 공간에서는 그것 역시 한 줌의 먼지 일 뿐이다.
그래서 이치를 알기 위해 양적인 지식에 집착하면 마치 남극에서 길을 잃어버린 탐험가처럼 우리는 영원히 이치의 주변을 맴 돌뿐 그것을 깨달을 수 없다.

격물치지의 원리는 그래서 중요하다.

사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죽도록 그것을 부여안는 것이 격물치지다.

양명학의 아버지 왕양명은 격물치지를 위해 어린 시절 뜰앞의 나무를 하루 종일 보고 또 보았다고 한다.

나무가 자라는 이치, 봄바람과 가을바람이 나무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무가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과정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심지어는 침식을 전폐하고 그것을 들여다보느라 청년기를 다 보냈다.

그러나 물론 그것에서 그가 얻은 이치는 없었으나 그는 그것으로 일생을 통해 이루어 낼 학문의 모든 준비를 끝냈다.

심지어 바위를 마주 앉아 이치를 궁구 하는 마음과 인내는 그가 생각한 "꽃을 보지 않으면 꽃은 없다"는 암 중화의 인식론을 이끌어 냈고 그는 양명학의 태두로 우뚝 서서 한국의 실학사상에 까지 깊은 영향을 남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치에 닿은 사람은 모두 그랬다.

그들은 초인적인 인내와 노력으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상의 이치를 탐구했다.

모두가 꽃을 보고 "꽃이다"라고 할 때 꽃이 피고 지는 이치를 보고, 모두가 "눈이 내린다"라고 할 때 자연의 순환을 생각했으며, 누군가가 상(喪)을 당하면 기의 순환과 인식을 뛰어넘는 윤회의 사상으로 연결 지었다.

이것은 이치를 구하는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이치를 접하고자 하는 자세를 상징한다.

우리가 고작 한 줌의 지식으로 수백만수천만이 부딪치는 곳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교만이다.
사회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그 안에서 성공을 꿈꾸는 것은 나를 제외한 수천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가상의 생명을 상대로 어르고 달래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것과 같다.

지금 당신이 성공을 생각하거든 먼저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못난 사람이라고 자인하는데서 출발하라, 지금 당신의 작은 지위가, 혹은 지식이, 혹은 재산이 남보다 많고 우월하다고 생각되거든 그 모든 것은 단지 우연일 뿐 지금까지 주어진 행운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스스로 누추하다고 여겨지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라

당신은 버릴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차라리 채우기가 쉽다.

어설프게 알고 어설프게 가지면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이 더 괴롭고 힘든 것이다.

당신이 성공을 꿈꾸거든 쓸데없는 것들은 모두 버리고(간과하고) 통찰력 (이치)을 키우라, 한 가지의 이치를 깨달으면 다른 이치를 여는 눈은 저절로 열린다.

짱 부자 경제학을 통해 통찰력을 키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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