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자 경제학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변화는 생존이기에

by 호이짜호이호 2022. 10. 12.
300x250
반응형

< 성공의 초석과 변화 >

 

1. 매끈

  - 까칠한 사람이 되지 말자.

-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 모난 돌이 정 맞기 쉽다.

- 세련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지녀라.

 

 

2. 발끈

 - 오기있는 사람이 되자.

- 넘어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 성공한다.    

-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구름 속의 태양을 봐라.

 

 

3. 화끈

 - 미적지근하게 살지 말라.

-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미루지 말고 오늘 하라.

  (내일 만나지.. 내일 전화하지.. X)

- 오늘을 합친 것보다 더 좋은 축복은 없다.

 

 

4. 질끈

 -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 알아도 모르는 척, 봐도 못 본 척하는 사람이 되자.

- 실수나 결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제발 솔직하지 말자.

   (몸에 살이 좀 찐 것 같아요.. 오늘 인상이 왜 그래요?.. X)

- 필요 없는 데 관심을 갖지 마라(예: 연예인 소식).

  중요한 일에 에너지를 집중하라.

 

 

5. 따끈

 - 계산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따뜻한 사람이 되자.

- 인간미 넘치고 털털한 사람, 손해 보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이 나는 좋다.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변화는 생존이기에 >


내가 잠든 사이 밤새 무서리가 내린 것처럼, 매일같이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세상을 점령한다.

잠시만 무관심하면 새로운 정보가 등장하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것 쏟아지며, 그에 따라 사람들은 우왕좌왕한다.


코로나로 인해 생긴 메타버스 세상(가상 현실)


내가 속한 사회는 딴 세상이 되고, 내가 손에 든 물건은 구닥다리가 되며,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헌책방에서조차 찾기가 어려워진다.

그나마 ‘안다’는 사람들도 대개 알음알이에 그칠 뿐 ‘무엇을?’이라는 물음에는 결코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토플러의 말대로 동시성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지금 내가 잠든 이 시간에도 지구 반대편에 사는 누군가는 무엇인가 새로운 물건을 만들고,
어떤 집단은 새로운 질서를 부르짖고,
또 어느 나라는 교묘하게 세계화로 포장된 신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순간 나는 잠들어버린 기계식 시계가 되어있다. 심지어는 멀쩡하게 눈을 뜨고
‘내게 익숙한’ 생산수단으로 작업을 하고
내가 알고 있는 ‘기성 관념’으로 혀를 차는 동안,
나를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은 나를 보고 혀를 찬다.

실로 두려운 세상이다.

변화의 속도가 시계 시간을 넘어 차원을 달리는 동안, 나는 나의 일상을 붙들고 바닥을 모르고 추락을 한다.
하지만 ‘변화의 속도는 그 시대를 규정하는 질서’다.


과거 변화가 더딘 세상은 그만큼 경쟁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이때 사람들은 느긋하다.
굳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것을 탐하거나 돌아보지 않아도 좋은 세상이다.
자고 나서 팔을 뻗으면 과일이 주렁주렁 달린 과실나무가 내 손에 닿고, 열 걸음만 걸으면 신선한 냇물이 흐르는 곳에 살던 사람들은 느긋하다.


그들에게 변화란 소란이다.

그러나 사람이 늘어나고, 배를 채우기 위해 점점 높은 가지에 달린 과실을 따야 하는 세상이 되면서 사람들은 고달파졌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나무를 기어올라야 하고, 오염된 물을 피해, 다른 강물을 찾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들판에 재배와 경작을 배우고, 또 늘어난 식구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는 다시 황무지와 비탈을 개간해야 했다.


이때 이들에게 변화는 생존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이 변화의 소용돌이는 소란일까? 생존일까?

이 답을 얻기 위해서는 약간의 고민이 필요하다.
달리는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은 기차와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것이다.

그것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자동차를 타고 철길을 따라 달리던지, 그것도 안되면 자전거를 타고 페달이라도 밟던지, 그것도 아니면 최악의 경우 죽기 살기로 달리기라도 해야 차창 너머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달리는 기차를 가만히 서서 지켜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면서 차창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고사하고 기차의 몸체에 쓰여있는 행선지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게 된다.

변화를 대하는 자세가 바로 그렇다.

변화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는 사람의 눈에는 세상이 정신없이
핑핑 돌고 있을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비정상적이라고까지 여겨진다.
그래서 ‘세상이 참 빠르게 변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가 변하지 않고 있음을 자복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닥쳐오는 고난은 늘 자신의 탓이 아닌 세상이 변한 탓이다.

가끔은 해괴하게도 스스로 늘 변화를 지향한다고 믿는 사람이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류다.
변화하는 사람의 눈에는 세상은 항상 머물러 있다. 기차를 따라 달리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내가 같은 방향의 기차를 타고 있을수록
건너편 기차는 멈춰있고, 내가 느리면 느릴수록
기차는 순식간에 내 앞을 지나쳐 버린다.


<변화는 생존의 도구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속도로 변하고 있다면, 내가 생존하는데 그만큼 힘든 세상이 된 것이고, 이미 과일은 나무의 맨 꼭대기에 오르다가 자칫 가지가 부러져 추락할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자리에 매달려 있다는 뜻이다.

이때 나는 그것을 따기 위해 원숭이처럼 몸을 가볍게 하고, 나무를 오늘 채비를 이미 끝내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에덴의 동산에서 떠난 지는 이미 수십만 년의 세월이 흘렀고, 사람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만큼 우리 손에 닿는 모든 곳에 과일은 떨어지고 냇물은 말라버렸다.
우리는 인류의 지성이 선사한 과학기술에 스스로 탄복하고 있지만, 원래 과학기술은 늘 그 상황에서 또 다른 생존을 위한 투쟁에 다름 아니다.

만약 변화가, 인류에게 축복이었다면, 역사상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는 ‘민중’ 혹은 ‘대중’이라는 이름의 안타까운 계급은 벌써 존재하지 않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인류가 기록을 남긴 이래, 지배와 피지배, 주류와 비주류의 간극은 항상 존재했고 잉여는 이 모두를 충족시킬 만큼 넉넉함을 베풀었던 적이 없다.

유황과 몰약 그리고 빵과 고기는 늘 부족했고, 우리가 무섭다고 여길 만큼 세상이 변하고 이성과 기술이 진보해도 그 ‘부족함’은 늘 같은 체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세상이 변화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생존의 새로운 수단일 뿐이다.

때문에 변화를 거부하는 것, 혹은 둔감한 것은 곧 그 생존의 수단을 포기하는 것이고, 내가 속한 처지와 환경을 절망적으로 수용하는 좌절이자, 패배이다.

그래서 변화는 늘 절실하다, 변화는 더 나은 환경을 위한 투자도 아니고,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인류 공동체의 대역사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도태를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만약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변화를 주도하라

모든 익숙한 것들을 거부하고, 나를 유혹하는 모든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라.

때로는 돈키호테의 모습으로, 때로는 은둔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혁명가의 그것으로 변신하라.

내가 기차보다 더 빨리 달려서 기차에 탄 사람들이 나를 보고 궁금해하고, 나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온 세상이 내가 탄 기차를 따라 종종걸음 치게 하라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궁(窮)하다고 여겨지는 당신이 결행해야 할 첫 번째 시작이다.

변화의 물결에 올라타라

728x90
300x250

댓글